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12세기 말,


하틴 전투의 참패로 멸망 직전까지 내몰렷던 예루살렘 왕국은


제3차 십자군 원정을 통해 간신히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비록 리처드 1세 등의 활약으로 해안 거점 도시들을 회복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정작 핵심 목표였던 예루살렘 탈환에는 끝내 실패하고 만다.


이후 동지중해의 정세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동로마 제국은 내부 정치 혼란과 재정 악화로 점차 약화되고 있었고,


서유럽의 군주들 또한 각자의 문제로 인해 십자군에 지속적인 지원을 보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외부 지원에 의존하던 예루살렘 왕국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든,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1198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인노첸시오 3세가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교황권의 강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한 인물로, 점차 약회되고 있던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했다.


당시 기독교 세계에서는 하나의 분명한 과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되찾는 일이었다.


하틴 전투 이후 성지는 살라딘의 손에 넘어갔고,


제3차 십자군 원정 역시 이를 되찾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로부터 약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 누구도 성지 회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노첸시오 3세에게 십자군 원정은 단순한 군사 행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교황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기독교 세계를 하나로 결집시키며,


나아가 자신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결국 그는 새로운 십자군을 선포하며, 성지 회복을 위한 대원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image.png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1198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성지 회복을 외치며 새로운 십자군 소집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 전,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던 주요 군주들은


원정이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경험 떄문에 선뜻 나서지 않았다.


이로 인해 초기 반응은 예상보다 차가웠다.


하지만 교황청과 성직자들은 유럽 전역에서 설교와 선전을 통해 십자군 참여를 적극 독려했고,


점차 귀족과 기사들의 참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이번 원정은 왕이 아닌, 프랑스계 기사와 봉건 영주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이렇게 해서 제4차 십자군이 형성되었다.


당시 계획에 따르면 1202년 여름까지 약 3만 명 규모의 병력이 집결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이에 인노첸시오 3세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십자군 지도자들은 회의를 통해 새로운 전략을 수립했다.


제3차 십자군 원정의 경험을 교훈 삼아,


직접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대신


이집트를 공략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당시 아이유브 왕조의 정치,군사적 중심이 이집트에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장악하면 성지 탈환도 훨씬 유리해질 것이라 판단했다.


또한 육로로 진군할 경우, 험난한 지형과 보급 문제, 그리고 동로마 제국 및 현지 세력과의 마찰 등


수많은 위험 요소가 존재했다.


이에 십자군은 해로를 통해 병력을 수송하여, 곧바로 이집트에 상륙하는 전략을 채택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대규모 병력을 한 번에 수송할 선박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십자군 구성원 가운데 대규모 함대를 보유한 영주는 없었기에,


이들은 해군력이 강력한 이탈리아의 상업 공화국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제노바 공화국과 접촉했지만 협상은 성사되지 않았고,


결국 십자군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협상에 나서게 된다.


image.png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1201년 5월, 십자군 수뇌부는 베네치아를 방문하여


도제 엔리코 단돌로와 본격적인 협상을 진행했다.


협상 결과, 베네치아는 약 3만 3,500명의 병력을 이집트까지 수송하고,


9개월 분량의 식량과 보급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그 대가로 십자군은 은화 8만 5천 마르크와, 향후 점령지의 일부를 베네치아와 나누기로 합의했다.


이는 베네치아 공화국에게도 엄청난 도박이었다.


베네치아는 이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상업 활동까지 축소하며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했고,


조선소를 밤낮으로 가동하며 대규모 함대 건조에 나섰다.


그 결과, 약 500척에 달하는 거대한 수송 함대가 완성되었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그런데..


약속된 집결 시점인 1202년 여름이 되었지만,


십자군은 예상과 달리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


결국 10월이 되어서야 베네치아에 집결한 병력은


고작 1만 2천 명 남짓에 불과했다.


이는 당초 계약했던 3만 명 규모에 한참 못 미치는 숫자였다.


문제는 단순한 병력 부족이 아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과 맺은 계약은 병력 수에 맞춰 비용을 나누는 구조였기 때문에,


인원이 줄어들수록 각 개인이 부담해야 할 금액은 급격히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상당수의 병사와 기사들은 비용을 감당하지 못했고,


약속했던 은화 8만 5천 마르크 중 상당액이 미납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로 인해 원정 계획은 시작도 하지 전에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은 제4차 십자군 원정을 위해 국운을 걸고 준비에 나섰다.


십자군과 체결한 협정에 따르면, 군마 4,500필과 종자 9,000명을 실을 수송선과


약 2만 5천명의 병력을 태울 대형 범선, 여기에 추가로 50척의 갤리선까지


최대 500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준비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무려 1만 4천 명에 달하는 선원이 필요했으며,


이는 당시 베네치아 성인 남성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규모였다.


베네치아는 이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무려 1년 동안 주요 상업 활동을 사실상 중단하고, 함대 건설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그런데..


정작 출항 시점이 다가오자, 십자군 병력은 예상보다 턱없이 부족했다.


이로 인해 원정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출항일은 기약 없이 연기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막대한 비용을 선투자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고,


도제 엔리코 단돌로와 수뇌부는 점점 초조함에 휩싸이게 된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당시 십자군이 지불하기로 한 운송비는 무려 8만 5천 마르크에 달했다.


이는 당시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의 연간 왕실 수입을 합친 것과 맞먹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병력이 크게 부족해지면서, 이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십자군은 자산을 처분하고, 귀금속을 녹여 돈을 마련하는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계약금에는 한참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이로 인해 십자군은 물론, 막대한 비용을 선투자한 베네치아 공화국 역시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도제 엔리코 단돌로와 베네치아 수뇌부는 십자군에게 하나의 제안을 내놓는다.


그것은 성지 탈환과 전혀 무관한


다른 기독교 도시를 공격하여 부족한 자금을 메우자는 것이었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베네치아 공화국은


오랫동안 아드리아 해의 패권을 두고 경쟁해온 도시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대상은 바로 헝가리 국왕의 보호를 받던 기독교 도시, 자라였다.


베네치아는 십자군에게 이 도시를 공격해 줄 것을 요구한다.


부족한 운송비를 대신하는 대가로, 자신들의 경쟁자를 처리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십자군의 본래 목적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행동이었다.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결성된 십자군이,


같은 기독교 도시를 공격한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에 일부 십자군 영주들은 깊은 수치심을 느끼고 원정을 포기한 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되돌리기 어려웠다.


파산 직전에 몰린 십자군과 베네치아에게 다른 선택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십자군은 결단을 내리게 된다.


1202년 11월 10일, 


그들은 기독교 도시 자라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이 소식을 접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크게 분노했다.


즉시 특사를 보내 십자군을 강하게 질책하며 공격 중단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십자군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1202년 11월 23일,


십자군은 결국 자라를 함락시키고,


도시를 약탈하여 부족한 자금을 충당하기에 이른다.


이는 단순한 군사 행동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자라는 분명 로마 가톨릭 세계에 속한 기독교 도시였으며, 교황의 권위 아래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교황의 이름으로 시작된 제4차 십자군 원정이 이슬람 세력이 아닌 같은 기독교 도시를 공격했다는 사실은,


교황의 권위를 정면으로 훼손하는 사건이었다.


이에 인노첸시오 3세는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해 강경한 조치를 취하게 된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헝가리 왕국 역시 강하게 반발했다.


자라는 헝가리 국왕의 보호 아래 있던 도시였기에, 십자군의 공격은 명백한 침략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결국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 모두 파문에 처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해체되지 않았다.


교황의 파문 서신은 십자군 지도부가 은폐해버렸고, 


십자군에 참여한 일부 성직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이를 해석하거나, 사실상 무력화하려 했고


스스로 사면령을 내렸다.


이는 분명 교회 질서를 벗어난 월권 행위였지만,


이미 자라를 공격하며 한 차례 선을 넘은 십자군은 


더 이상 교황의 권위에 복종하는 집단이 아니게 되어 있었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궁지에 몰린 십자군에게, 예상치 못한 제안이 도착한다.


당시 동로마 제국에서는 황제 이사키오스 2세가 실정 끝에


동생 알렉시오스 3세에게 폐위되는 사태가 벌어져 있었다.


이때 폐위된 황제의 아들, 알렉시오스 4세가 십자군과 접촉해 온 것이다.


그는 아버지와 자신의 제위를 되찾아 달라고 요청하며,


그 대가로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십자군이 베네치아에 지고 있는 빚을 대신 갚고, 이집트 원정을 위한 자금으로 20만 마르크를 지불한다.


둘째, 성지 방위를 위해 병사 1만 명과 기사 500명을 지원한다.


셋째,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고, 동방 정교회를 로마 가톨릭 교회 아래로 통합시킨다.


즉,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여 현 황제를 몰아내기만 한다면,


십자군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이었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인노첸시오 3세는 이 계획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동로마 제국과의 충돌은 십자군의 본래 목적과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십자군은 교황의 통제를 벗어난 상태였다.


자라를 공격하며 선을 넘어선 그들에게, 20만 마르크라는 거액은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또한 베네치아 공화국 역시,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인물을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세워


막대한 상업적 이익과 특권을 확보할 기회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결국 십자군은 알렉시오스 4세의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그는 십자군의 지원을 등에 업고 황제로 옹립될 준비를 마쳤고,


이로써 원정의 방향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이제 그들의 목표는 더 이상 성지가 아니었다.


1203년 4월,


십자군과 베네치아 연합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해 출항한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1203년 6월 24일,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 연합군의 거대한 함대는


마르마라 해를 지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서방 세계와 미묘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설마 십자군이 자신들을 공격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십자군이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대규모 함대가 눈앞에 나타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서방의 대군 앞에서


동로마 제국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image.png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연합군은 곧바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면 공격하기보다는,


전략적 요충지인 금각만 북쪽의 갈라타 지역을 먼저 공략하기로 했다.


갈라타는 높은 성벽으로 방어된 거점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금각만 입구에는 거대한 쇠사슬이 설치되어 있어


적 함대의 진입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이 방어선을 제거하지 않는 한, 해상 전력을 활용한 공격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연합군은 갈라타를 향해 공격을 감행했고, 치열한 전투 끝에 요새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어 금각만을 가로막고 있던 쇠사슬까지 끊어내며,


함대가 만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로써 연합군은 해상과 육상 양면에서 동시에 공격을 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고,


금각만 방면에서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된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7월 11일, 연합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을 감행했으나


견고한 성벽 앞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


며칠 뒤인 7월 17일, 연합군은 다시 한 번 대규모 공세에 나섰다.


황제 알렉시오스 3세는 직접 전장에 나서며 필사적으로 성벽 방어를 지휘했다.


연합군은 맹렬한 공격 끝에 성벽 일부를 돌파하고, 


무려 25개의 망루를 점령하는 등 동로마 군을 강하게 압박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


동로마 제국은 최정예 부대인 바랑기안 근위대를 투입한다.


중무장한 이 정예 병력의 반격은 성공했고,


결국 연합군의 공세는 저지되며 전황은 다시 동로마 제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그 와중에, 연합군이 퇴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화재가 문제를 일으켰다.


불길은 빠르게 번지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내로 확산되었고,


대규모 화재로 이어지며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그러나 분노한 시민들의 화살은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도시를 방어하며 분전하고 있던 황제 알렉시오스 3세를 향해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연이은 전투와 화재로 민심이 크게 흔들리자, 


황제는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그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외부에서 병력을 모으겠다며 정예병과 상당한 자금을 들고 도시를 떠난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이사키오스 2세


수도의 시민들과 귀족들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이들은 폐위되었던 황제 이사키오스 2세와, 


연합군이 지지하던 그의 아들 알렉시오스 4세를 공동 황제로 옹립하기로 합의한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사실상 함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들의 도움으로 다시 제위에 오른 이사키오스 2세의 심정은 복잡했다.


겉으로는 황제의 자리를 되찾았지만,


그 대가로 수도 한복판에 십자군을 끌어들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문제는 약속이었다.


image.png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알렉시오스 4세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에 약속한 조건은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막대한 금액인 20만 마르크의 지급, 대규모 병력 파견, 그리고 교황권 인정과 교회 통합까지...


어느 하나 쉽게 이행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사키오스 2세는 과거 폐위 과정에서 두 눈을 뽑힌 상태였기에,


실질적인 통치 능력 또한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십자군이 옹립한 황제 알렉시오스 4세의 권력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 주변 지역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한편 폐위된 황제 알렉시오스 3세는 도주 후에도 완전히 몰락하지 않았고,


지방으로 이동해 군대를 재편성하며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십자군이 요구한 조건 중 하나였던


대규모 병력 파견은 사실상 이행이 불가능했다.


또 다른 조건인 교회 통합 역시 


동방 정교회 내부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현실성이 거의 없었다.


결국 남은 것은 20만 마르크의 거액뿐이었다.


이 조건만큼은 십자군 역시 가장 현실적으로 기대를 걸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그런데...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20만 마르크를 마련하기 위해 국고를 열었지만,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이사키오스 2세 시기의 방만한 통치로 인해 재정은 파탄 직전이었고,


제국 곳곳의 금고 역시 사실상 고갈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폐위된 알렉시오스 3세가 남아 있던 자금 일부를 챙겨 도주하면서,


제국에는 십자군에게 지급할 재원이 사실상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결국 약속된 20만 마르크는 처음부터 이행이 불가능한 조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결국 약속된 금액이 지급되지 않자,


베네치아 공화국과 십자군은 강하게 반발하며 즉각적인 지급을 요구했다.


압박이 거세지자 알렉시오스 4세는 어쩔 수 없이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극단적인 조치에 나섰다.


세금이 대폭 인상되었고, 황실의 보물과 성물이 팔려 나갔으며,


심지어 교회의 재산까지 징발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오히려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시민들은 과도한 징세와 성물 처분에 격분했고, 교회 역시 교회 통합 시도에 대한 불신과 반발로 협조하지 않았다.


결국 도시 내부의 긴장이 급격히 고조되며 반란 조짐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알렉시오스 4세는 마지막 선택으로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둔을 공식적으로 허용하고, 도시의 치안을 그들에게까지 맡기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각종 징세와 징발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인 금액은 약 10만 마르크에 불과했다.


당초 약속된 20만 마르크에는 크게 못 미치는 액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주둔하던 연합군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한편 알렉시오스 4세는 지방에서 세력을 규합 중이던 폐위 황제 알렉시오스 3세를 제압하기 위해


직접 중앙군을 이끌고 수도 밖으로 출정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수도 내부는 황제의 통제력까지 약화된 채 


점점 더 불안정한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그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폭동이 발생하여,


도시에 거주하던 라틴인들이 공격을 받아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연합군은 보복에 나섰고, 도시 내 무슬림 거주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투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며,


무슬림뿐 아니라 정교회 주민들까지 피해를 입는 상황으로 번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격화되었고,


도시 내부에서는 민병대가 조직되어 연합군에 대한 저항이 본격화되었다.


열세에 몰린 연합군은 철수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도시 곳곳에 불을 지르며 퇴각했고,


이 화재는 빠르게 확산되어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시민과 연합군 모두의 통제에서 벗어난,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극도의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된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알렉시오스 4세는 결국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알렉시오스 3세를 제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수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는 이미 통제 불능 상태였다.


화재와 폭동, 약탈과 보복이 이어지며 도시 전체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공포에 질린 알렉시오스 4세는 십자군의 보호 아래 황궁에 사실상 은둔하다시피 머물게 된다.


황제 부자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커지자, 귀족과 시민들은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이 과정에서 궁정의 유력 인물이었던 알렉시오스 두카스가 부상한다.


그는 시민 세력과 궁정, 그리고 십자군 사이를 오가며 상황을 장악한 끝에 쿠데타를 일으켰고,


결국 황제 부자를 모두 구금하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이사키오스 2세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알렉시오스 두카스는 스스로를 알렉시오스 5세로 선포하며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연합군은 자신들이 옹립했던 황제 부자를 몰아낸 알렉시오스 5세를 즉시 적대하기 시작했다.


알렉시오스 5세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급히 군대를 소집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을 보강하는 등 방어 태세를 갖추며


십자군과의 최종 결전을 준비했다.


이렇게 급히 모은 병력을 이끌고, 그는 먼저 연합군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그러나 연합군의 전력은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알렉시오스 5세가 직접 이끄는 동로마 군대는 전투에서 패배했고,


결국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204년 2월 8일, 알렉시오스 5세는 엔리코 단돌로와 직접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연합군이 요구했던 알렉시오스 4세의 기존 약속을 이행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결국 협상은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그 직후, 연합군이 옹립했던 알렉시오스 4세는 교살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연합군 내부에서도 최종 결정을 두고 의견이 크게 엇갈리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자 점차 강경론이 주도권을 잡게 된다.


그 중심에는 엔리코 단돌로가 있었다.


그는 연합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직접 함락시켜


전리품을 확보하고, 동시에 베네치아가 떠안은 빚 문제까지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연합군은 그의 주장에 동의하게 된다.


단돌로의 계산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가 아니었다.


주요 도시와 섬, 항구를 장악할 경우 베네치아는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무역로를 사실상 독점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동방 무역 전반에 대한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한다면 


경쟁 세력의 흑해 무역권까지 통제할 수 있는 결정적인 위치를 확보하게 되는 샘이었다.


결국 연합군은 당장의 전리품과 이익에 집중한 나머지


그 선택이 가져올 장기적인 결과는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결정을 내리게 된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1204년 4월 8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해 연합군은 총공격을 감행했다.


공성탑과 투석기 등 다양한 공성 병기가 동원되었고, 대규모 병력이 성벽을 향해 지속적으로 밀려들었다.


그러나 도시를 둘러싼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여전히 견고했다.


동로마 군은 병력에서 열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건한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보호 아래 끝까지 저항을 이어갔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인노첸시오 3세는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고 있다는 소십을 접하자 사색이 되었다.


그는 즉시 특사를 보내,


같은 기독교 도시를 공격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자라에서의 사건을 반복하지 말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미 교황의 권위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그들은 이번 사태의 책임이 동로마 제국 측에 있다고 주장하며,


교황의 특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돌려보낸다.


이후 연합군은 망설임 없이 공세를 재개했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방어전은 점점 격렬해졌다.


알렉시오스 5세는 직접 수비대를 지휘하며 성벽 방어에 나섰고,


도시의 시민들 또한 자발적으로 무장하며 방어전에 동참했다.


이와 함께 제국 최정예 부대인 바랑기안 근위대까지 투입되며


전투는 더욱 치열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하지만 연합군의 공세는 점점 더 거세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방어군은 끊임없이 밀려드는 공격을 막아냈지만,


전선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고 외곽 성벽들이 하나둘씩 함락되었다.


결국 4월 12일, 연합군은 주요 성벽 구간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도시 방어선이 무너지자 알렉시오스 5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급히 수도를 빠져나와 도주하게 된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1204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결국 연합군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900년이 넘도록 동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제2의 로마'로 기능해온 도시가 무너진 순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수백 년 동안


이슬람 세력과의 수많은 전쟁 속에서도 버텨왔지만,


끝내 같은 기독교 세계 내부에서 온 십자군의 손에 함락되고 말았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자, 연합군은 도시 내부로 일제히 진입했다.


수도의 시민들은 십자군 영주를 새 황제로 받아들이려 했고,


관례에 따라 3일간의 약탈이 이루어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동로마인들에 대한 오랜 적대감과 분노로 가득했던 약 2만 명 규모의 연합군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도시 전역에서 대규모 약탈을 시작했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 이후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로 빠져들었다.


십자군은 도시 전역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약탈했다.


수백 년 동안 유지되어 온 건물들은 방화로 무너졌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교회의 성소만이라도 보호해 달라고 거듭 요청했지만, 이러한 호소조차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도시 곳곳에서는 폭력과 약탈이 이어졌고,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었으며 재산은 대부분 약탈당했다.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온 고대 로마의 문화유산 또한 이 과정에서 크게 훼손되거나 소실되었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약탈은 도시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황제들과 무덤과 유적지까지도 예외가 되지 않았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묘역이 훼손되었으며,


바실리오스 2세의 묘역 또한 파괴되어 황제들의 유해가 훼손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도시 내부의 혼란 속에서 이러한 유물과 유적들은 철저히 약탈되거나 파괴되었다.


성당에 보관되어 있던 수많은 성화와 예술품 역시 불길 속에서 소실되었고,


도시는 사실상 문화적,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연합군은 이 과정에서 막대한 전리품을 확보했으며,


약 90만 마르크에 달하는 가치의 재산이 약탈된 것으로 전해진다.


수많은 시신과 집을 잃은 주민들, 그리고 잿더미로 변한 도시만이 남게 되었다.


한때 세계 최대의 도시이자 동로마 제국의 심장이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그렇게 몰락했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이러한 참혹한 상황은 단순한 전투의 결과라기보다는, 오랜 기간 누적된 양측의 적대감이 폭발한 결과이기도 했다.


특히 그 배경에는 과거의 사건들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1182년에 발생한 라틴인 학살 사건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거주하던 라틴계 주민들이 대규모로 희생된 일이 있었고,


이 사건은 서방 세계의 강한 충격과 분노를 남겼다.


이후 양측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고, 상호 불신과 적대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졌다.


결국 이러한 역사적 긴장감은 제 4차 십자군 원정 당시 폭발하며,


전쟁이 본래의 목적을 벗어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약탈로 이어지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동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십자군 세력은 라틴 제국을 중심으로,


아테네 공국, 아카이아 공국, 테살로니키 왕국 등을 수립하며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분할하였다.


한편 동로마의 잔존 세력 또한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았다.


황족과 귀족들은 각지로 이동해 정권을 세웠고,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등을 형성하여


십자군 세력에 맞서 저항을 이어갔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알렉시오스 5세는 도주 중에 사로잡혀 처형되었고,


알렉시오스 3세는 지방에서 잔존 병력을 규합하며 끈질기게 저항을 이어갔으나 결국 포로로 붙잡히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그의 사위인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는 니케아로 이동하여 세력을 결집했다.


그는 아나톨리아로 침투한 십자군 세력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정치적 기반을 강화했고,


이후 스스로 니케아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니케아 제국은 이후 세력을 회복해 나가며 


훗날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고, 붕괴되었던 동로마 제국을 재건한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이후, 라틴 제국의 전성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205년 봄, 트라키아에서 대규모 반란이 발생했고,


이 지역의 반란 세력은 라틴 세력과 적대 관계에 있던 불가리아 제국과 연합하여 십자군 세력에 맞섰다.


결국 전투에서 라틴 제국은 참패를 당했고, 황제 보두앵 1세는 포로로 잡히는 결과를 맞이했다.


이 패배는 라틴 세력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고, 


엔리코 단돌로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면서


라틴 제국은 건국 초기부터 급격한 쇠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image.png 유럽 역사상 최악의 스노우볼, 4차 십자군 전쟁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은 동지중해 무역권을 장악하며 크게 번영했다.


그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이 수행하던 동서 교역의 완충 역할과 아나톨리아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역 균형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 틈을 타 아나톨리아의 튀르크 세력은 점차 성장했고, 이후 오스만 제국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며 제국을 재건했지만,


이전과 같은 전성기를 되찾지는 못했다.


결과적으로 제4차 십자군 원정은 동로마 제국을 크게 붕괴시켰고, 


이후 중세 동지중해의 권력구조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댓글

아름다운 중년

건강하중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