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제국 몰락의 서막
11세기
명군 바실리오스 2세의 치세 동안, 동로마 제국은 다시 한번 중흥을 이루었다.
그는 976년, 어린 나이에 황제로 즉위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당시 내우외환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제국의 실권은 유력 귀족들에게 넘어가 있었고, 권력 다툼으로 인해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동방에서는 이슬람 세력의 침입이 계속되었고,
발칸반도에서는 불가리아 제국이 막강한 군사력으로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이러한 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했다.
반란을 하나씩 진압하면서, 중앙 집권 체제를 재정비했고, 황권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특히 1018년, 오랜 전쟁 끝에 불가리아 제국을 완전히 정복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발칸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또한 동방 국경에서도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여, 안정된 국경선을 구축하고 제국의 위신을 높였다.
그의 치세 아래, 정예화된 군대는 불가리아에서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수복했으며,
주변국들은 동로마 제국의 위세 앞에 앞다투어 머리를 조아렸고,
한 때 잃었던 영광은 다시 제국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자식도 남기지 않은 채 1025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생 콘스탄티노스 8세가 65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즉위했지만,
콘스탄티노스 8세는 병약했고, 정치적 능력도 부족했으며, 나이가 너무 많았다.
결국 그의 치세는 2년만에 끝났고,
그 후 수십 년간 잦은 내전과 황제 교체가 반복되었다.
권력 다툼과 귀족 세력 간의 갈등으로 중앙 정부는 흔들렸고,
강대했던 제국의 위세는 점차 약회되기 시작했다.
동로마 제국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이란 지역에서는 새로운 강력한 패권국이 등장했다.
바로 셀주크 제국이었다.
트란스옥시아나와 이란 지역을 모두 장악한 셀주크 군대의 칼끝은
곧 동로마 제국을 향해 겨누어졌다.
1040년대부터 이어진 양국 간의 충돌은 점차 격화되었고,
1064년에는 아르메니아의 전략적 거점 아니가 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동로마인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068년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미하일 7세였다.
그는 1067년 즉위 당시 겨우 17세에 불과한 어린 나이였다.
젊고 정치 경험이 부족했던 미하일 7세 대신,
실질적인 통치는 그의 어머니인 황후 에우도키아가 맡고 있었다.
제국 내부에서는 귀족 가문 간 권력 다툼이 계속되었고, 외북에서는 셀주크 제국과 같은
강력한 이슬람 세력의 침입이 빈번했다.
이로 인해 제국은 심각한 군사적,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에우도키아 황후는 제국을 구할 수 있는 강력한 군사 지도자가 필요함을 절감했고,
명망 높은 장군 로마노스 디오게네스를 황제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1068년, 에우도키아는 로마노스 디오게네스와 재혼하며 그를 '로마노스 4세'로 황제로 즉위시켰다.
로마노스 4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바탕으로 셀주크 세력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1068년부터 1070년까지 꾸준히 원정을 나섰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더구나 원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세금이 부과되고,
황제의 강압적인 통치 방식으로 인해 제국 내부의 불만은 점점 커져만 갔다.
초조해진 로마노스 4세는 이러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승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대규모 원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071년
로마노스 4세는 테마 둔전병들과 중앙군, 그리고 각지에서 모인 용병들을 합쳐
약 7만 명의 대군을 편성하여 소아시아 내 셀주크 제국의 거점들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했다.
하지만 군대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부 용병들이 현지에서 약탈을 일삼아 병력과 보급이 크게 소모되었다.
열악한 보급 상황과 지휘 쳬계의 혼란 역시 동로마 제국군의 전투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군대를 두 부대로 나누기로 결정했다.
그는 중앙군과 바랑기안 친위대, 그리고 프랑크 용병들로 구성된 본대를
장군 요세프 타르하니오티스에게 맡겼고,
자신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만지케르트로 진군했다.
로마노스 4세 휘하의 병력들은 3만 명에 달했다.
로마노스 4세는 셀주크 제국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이 아직 멀리 있거나 도착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알프 아르슬란은 이미 3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만지케르트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동로마군이 분리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알프 아르슬란은
요세프 타르하니오티스가 이끄는 중앙군을 기습하여 격파시켰다.
하지만 로마노스 4세는 본대가 이미 철군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반면, 알프 아르슬란은 척후병을 통해 동로마 군의 움직임을 세밀히 파악하고 있었고,
로마노스 4세는 만지케르트를 손쉽게 점령할수 있었지만,
곧 셀주크 대군이 빠르게 로마군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 셀주크 제국의 기록에서는 알프 아르슬란이 요세프 타르하니오티스의 동로마 본대를 공격해 패퇴시켰다고 기록되었지만,
동로마 제국의 기록에서는 요세프 타르하니오티스가 독단적으로 군대를 철수시켰다고 전해진다.
1071년 8월 26일
동로마 제국과 셀주크 제국의 양 군대는 만지케르트 평원에서 마주쳤다.
로마노스 4세의 군대는 좌익에 테마 둔전병을, 우익에는 아르메니아 기병과 또 다른 테마 둔전병이 배치되었다.
중앙에는 황제의 친위대와 중앙 테마 둔전병이 자리 잡았다.
후방에는 황제의 정치적 경쟁자였던 안드로니코스 두카스가 지휘하는 게르만과 노르만 용병 부대가 예비대로 배치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예비 병력을 황제의 정적이 맡게 되면서, 로마노스 4세의 마음 한켠에 불안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불안은 이후 전투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셀주크 군의 핵심 전력은 기동성이 뛰어난 궁기병대였다.
그들은 스웜 전술을 통해, 끊임없이 화살을 퍼부었다.
동로마군의 좌익과 우익은 이 지속적인 궁기병들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 스웜 전술, 산개하여 뛰어난 기동력으로 접근과 후퇴를 반복하며 적을 소모시키는 전술
일시적으로나마 셀주크 본진을 향해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동로마군 좌익과 우익은 계속되는 궁기병대의 화살 세례로 인해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셀주크 군은 전통적인 스웜 전술에 따라 퇴각하는 척하며 적을 유인했고,
이는 동로마군 양익을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셀주크 궁기병들은 끊임없이 동로마군 양익을 괴롭히며 로마군을 포위하려 했다.
상황을 직감한 로마노스 4세는 포위망에 완전히 갇히기 전에 군대를 질서 있게 후퇴시키고자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로마노스는 후방에 대기 중인 예비대,
특히 안드로니코스 두카스가 지휘하던 노르만 및 게르만 용병들을 투입해 반격을 시도할 계획이었다.
실제로 동로마군의 중앙은 셀주크 진영 깊숙이 돌파에 성공했었고, 한때 술탄 알프 아르슬란의 본진 가까이 접근하기도 했다.
전열을 재정비한 후 예비대와 함께 반격한다면, 아직 승산은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그는 로마노스 4세의 전략적인 퇴각 명령을
황제가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주한다는 신호로 고의적으로 왜곡한 뒤, 예비대를 전장에서 철수시켰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후방 병력이 사라지자,
전방에서 고군분투하던 동로마군은 엄청난 혼란에 빠져버렸다.
계속되는 셀주크군의 포위 시도에 동로마 병사들은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모든 전선의 셀주크 군에게 총공세를 명령했다.
동로마 군의 전열이 무너진 상태에서 정면 돌파를 감행한 중장기병대의 맹공은 결정타가 되었고,
혼란에 빠진 동로마 병사들은 각개격파 당하거나 대열을 이탈해 패주하기 시작했다.
결국 로마노스 4세는 분전 끝에, 중심부에서 고립되어 포위되었고,
단순한 패배를 넘어서, 제국의 기반을 뒤흔들었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튀르크족은 아나톨리아 내부로 급속히 침투했고,
동로마 제국은 천 년 가까이 방어해 온 아나톨리아 중심부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지방의 테마 둔전병 체계는 붕괴되었고
농민 병사들의 기반이던 토지는 유목민들에게 넘어가거나 황폐화되었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세수와 병력 충원 기반을 동시에 상실했고,
동로마 제국은 본격적으로 쇠퇴기에 접어든다.
제국의 운명은 썰물처럼 무너져 내렸다. 동방에서 제국군은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고 튀르크는 영역을 확대했다.
흑해와 에게해, 지중해와 킬리키아에서 이집트까지 튀르크는 제국의 지배권을 얻어내었다.
-안나 콤니니-
포로로 잡힌 로마노스 4세와 알프 아르슬란 사이의 유명한 대화가 있다.
로마노스 4세에게 알프 아르슬란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알프 아르슬란 : "만약 내가 포로로 잡혀 그대 앞에 섰다면, 그대는 나에게 어떻게 했겠소?"
로마노스 4세 : "당신을 죽이고, 그 목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문 위에 내걸었을 것이오."
알프 아르슬란 :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더 심한 일을 하겠소, 바로 당신을 용서하고 풀어주겠소."
이는 단순한 자비가 아니라, 동로마 제국 내부의 분열을 이용하려는 알프 아르슬란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자유의 몸이 된 로마노스 4세는 복수심에 불타, 곧장 군대를 모아
배신자,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와 내전을 벌였다.
하지만 내전에서 패배한 그는 결국 폐위당하고, 두 눈이 뽑힌 채 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만지케르트 이후 아나톨리아 중앙부를 빠르게 수복할 기회를 완전히 상실했다.
그 결과, 아나톨리아 고원은 튀르크의 손에 넘어갔고,
이후 동로마 제국은 멸망할 때까지 이 지역을 끝내 수복하지 못한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