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전쟁을 시작하기에는 매우 쉬웠으나 멈추는 것은 쉽지 않았다.

"I shall go to Korea."

치트키 쓰네;;;
1952년 말에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아이젠하워는 당선된다면 한국에 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은 싸구려 약속이라고 공격을 받았지만, 1951년부터 이어진 교착 상태와,
한 달에 미군 사상자가 2,500명이 발생하고 있는 점에 매우 못마땅했던 미국인들의 표심을 흔들었습니다.
실제로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되었습니다.

약속은 바로바로 지켜야지.
실제로 11월 21일, 아이젠하워는 12월 초에 한국에 갈 것이며 전선을 둘러보겠다고 말했습니다.
대통령 당선자가 한국에 온다는 소식은 미군 모두에게 잠시 희망을 주었습니다.

드디어 제대로 싸울 수 있겠어. 답답해 죽을 것 같았는데.
이미 장교들은 '맥아더가 옳았어!' 라고 떠들고 다닌다고.
장군들은 미군에게 걸린 제한을 풀고 제대로 싸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씨발 드디어 집에 갈 수 있는 건가?
병사들은 자신들이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습니다.

대통령님, 한국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병력, 물자, 계획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외면)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는 대규모 수행단을 이끌고 한국에 방문해 전선을 시찰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당시 유엔군사령관인 클라크 대장의 계획을 읽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새로 들어선 정부는 전쟁의 확대가 아니라 명예로운 평화를 원했습니다.
아이젠하워가 한국에 있을 동안, 탄약 등의 물자가 더 보급되었지만
이는 오직 적을 압박하는 데 쓰일 뿐, 북진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아이젠하워는 돌아갔고, 장군들과 병사들도 기대를 접었습니다.
그 대신 미국은 적에게 심리적 압박을 높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전 세계 여러분!!! 미국이 제네바 협정을 어기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2년 동안은 공산 진영이 미국을 선전으로 두들겼습니다.
미국 파일럿들을 고문해 미국이 세균전을 벌였다고 주장했으며
미국이 사로잡은 포로 중 절반 이상이 송환을 거부한다는 사실과
거제도에 수용된 포로 수천 명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엮어
미국이 포로를 학대, 고문한다고 모함했습니다.

뭐래 병신이
하지만 헤이든 보트너 장군이 거제도를 정상화하고,
중립국 외부인들로부터 점검을 받기 시작하자 공산 진영은 점점 선전에서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공산 진영은 포로수용소를 국제적십자사를 포함해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을 침략하기 시작한 자들이 전쟁을 끝내기를 원치 않는 것 같다."
협상 초반에는 세계 여론이 포로 문제 때문에 혼란스러워 했으나, 이젠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입장이 사실이라는 것이 느리기는 했지만 점점 분명해졌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포로 송환 거부를 인정하든 말든 세계는 점점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당시 유엔 사무총장인 트뤼그베 리를 포함해 세계는 공산 진영의 태도에 짜증을 내게 되었습니다.
1952년 늦게 세계 여론은 공산 진영에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반대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1953년 1월, 아이젠하워의 대통령 취임 기념 퍼레이드에 신무기를 선보였습니다.
바로 아토믹 애니(Atomic Annie)라 불린 M65 원자포(M65 atomic cannon)였습니다.
전술핵 운용을 위해 만들어진 이 280mm 야포는 핵탄두를 발사할 수 있는 야포였습니다.
실제로 1952년,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 보이' 수준의 핵탄두를 발사하는 실험도 마친 이 야포는
실험 결과, 배치된 병력을 포함하여 모든 방어 시설을 깔끔하게 선별적으로 지워버릴 수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군과 달리 주야간, 그리고 날씨에 상관없이 지상군에게 핵 지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무시무시한 무기가 극동에 도착하고 전술핵탄두가 뒤이어 도착하자
공산 진영은 그동안 느끼지 못한 심리적 압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씨발;;; 슬슬 익절해야겠는데;;;
선전에서 지고 있던 중공은 아시아에서 엄청난 명성을 아직 갖고 있었습니다.
중공은 서구의 군대와 싸워 그들을 겉보기에는 정지 상태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러나 간신히 이루어놓은 균형에 만일 미국이 산업과 전술핵전력을 투입한다면
중국의 이득은 더 빠르게 사라져버릴 것이 분명했습니다.

슬슬 전쟁 끝내시죠... 저희 이제 내정 관리도 해야 하는데;;;
또한, 중공군이 여전히 허풍을 떨며 이야기할 때, 베이징에선 걱정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군사적인 염려 뿐만 아니라, 1953년은 중국이 내전의 복구를 어느 정도 끝내고
'제 1차 5개년 계획'을 착수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대규모 국가 사업과 전쟁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레닌의 가장 가까운 동료요. 그의 계승자였으며, 공산당과 소련 인민의 현명한 지도자이자 교사로서 우리 곁에 있던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의 심장이 박동을 멈추었다!"
1953년 3월 5일,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했습니다.
스탈린을 칭송하며 무덤에 묻기도 전에 모스크바에서는 권력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동독과 소련의 위성 국가에서는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소련은 내부 권력 투쟁과 위성 국가에서 벌어진 소요를 모두 극복했으나
크렘린 안의 모든 파벌들은 외국에서 모험을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십새끼들이 한밤중에 전문을 보내고 지랄이야.....?
1953년 3월 28일, 도쿄에서 한밤에 클라크 대장은 펑더화이와 김일성으로부터 온 전문을 받았습니다.

병들고 부상 당한 포로들을 교환하는 것은 좋은 생각입니다.
또한, 1952년 10월 8일 이후로 휴회한 본회의를 판문점에서 즉각 재개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 이새끼들이 이번엔 무슨 속셈이지....?

"중공과 북한은 모든 포로들의 심사를 위해서 중립 송환 위원회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진짠가?
처음에는 공산 진영으로부터 온 제안을 의심스럽게 바라본 미군이었지만
3월 30일, 중공의 저우언라이가 공개적으로 포로 심사를 동의하는 발표를 하자
미군 역시 휴전 회담을 재개했습니다.

아 씨발 포로 숫자 차이 뭔데

뭐 어쩌라고
4월 11일, 양측은 부상 포로와 병든 포로의 교환 조건에 합의했습니다.
유엔군은 5,800명을 돌려보내고, 공산측은 684명을 돌려보냈습니다.
미군 포로 중 58%가 이미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진 후에는 이미 휴전 회담이 상당히 진행된 뒤였습니다.
전 세계에 한국에서 전쟁이 끝날 수 있다는 희망이 퍼졌습니다.
1950년 여름 이후로 발길을 끊었던 기자들이 한국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와중에 중공은 1953년 4월에 폭찹 고지에서 마지막으로 미군을 시험했습니다.

씹새끼야 진짜 마지막까지 사기칠래?

제대로 확인도 안했던 네 잘못이지
4월 20일, 폭찹 고지에서 뜨거운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리틀 스위치라는 이름으로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은 한참 뒤인 4월 26일에 적이 꼼수를 썼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포로 교환으로 돌아온 다수의 포로 중 다수는 병들거나 부상 당한 포로가 아니라
중공군의 말을 잘 들은, 한마디로 '부역자'들이었습니다.
중공군은 이들을 돌려보내면서 포로를 잘 대우했다고 선전했고
미국 역시 공산 진영에 협조한 포로들을 처벌할 타이밍을 놓쳐버렸습니다.

됐고 협상이나 빨리 합시다.
리틀 스위치 다음날인 1953년 4월 27일,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이 진지하게 시작되었습니다.
공산 진영은 6개의 제안을 내놓았고 핵심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송환을 희망하는 모든 포로는 휴전 협정 체결 후 2개월 안에 본국으로 송환된다.
2. 송환을 희망하지 않은 포로는 그로부터 1개월 뒤 중립국으로 보내진다. 본국이 파견한 인원들은 중립국에서 6개월 동안 이 포로들을 접견하면서 설명할 수 있다.
3. 포로들이 중립국에서 본국 송환을 요구하면 즉각 석방된다.
4. 이런 6개월의 과정을 거친 뒤에도 남아 있는 포로가 있으면 이들을 처리하는 문제는 휴전 협정 뒤에 이어지는 정치 회담에 의제로 제출해 처리한다.

양심없는 새끼들...
1953년 5월은 위의 제안을 수정하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5월 말, 앞에서 언급한 폭찹 고지 전투처럼 전 전선에서 중공군이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공세는 미군이 아닌 다른 유엔군, 한국군에 집중되었습니다.
결국 전초와 고지 몇 개를 중공군에게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제 진짜 다 끝나가네요.
6월 4일, 공산 진영은 미국이 제시한 모든 주요 대안에 사실상 동의했습니다.
포로 문제는 다음과 같이 최종 타결되었습니다.
1. 2개월 안에 공산 진영과 유엔은 지체 없이 송환되기를 희망하는 모든 포로를 본국으로 돌려보낸다.
2. 양측에서 송환되기를 거부하는 포로를 보호할 수 있는 중립국 위원회를 비무장지대 내에 설치한다. 중립국 위원회와 이 포로들은 인도군이 경비한다.
3. 이후 90일 동안 양측이 정한 대표자들은 송환되기를 거부하는 포로들에게 설명하는 시간을 갖는다.
4. 이후 30일 동안 인도군이 계속해서 포로들을 경비하고 최종적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하는 포로들의 거취 문제를 다룰 회담을 개최한다.
5. 30일이 경과한 뒤에도 이 포로들의 조항이 결정되지 않으면 이들은 민간인으로 신분이 전환된다.
6.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이렇게 민간인으로 신분이 바뀐 이들이 새로운 정착지를 찾는 것을 돕는다.

"휴전은 결코 안 되오!"
모두가 동의한 가운데 대한민국과 이승만 대통령만이 휴전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감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이승만은 휴전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휴전 조건은 대한민국과 국민들을 분단시키고 남한 사람 100만 명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승만과 대한민국의 비극은 간단했습니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도움 없이 싸움을 계속할 수 없었지만
휴전을 받아들이는 것은 한국인들에게 영구 분단을 뜻했습니다.
또한 대한민국은 영원히 경제적으로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클라크 대장 지휘 아래에 있는 한국군을 빼냈습니다.
그리고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 27,000명을 석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

아 관리 제대로 안하냐?
이 사건은 미국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이승만을 비난하는 소리가 쏟아졌습니다.
공산 진영 쪽에서는 매우 골치 아픈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이승만이 휴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 미국은 한국을 통제할 수는 있는가?'
그러면서도 공산 진영은 분노와 선전을 상당 부분 미국이 아닌 '살인자 이승만'에게 집중했습니다.
이는 공산 진영도 휴전을 바란다는 제스처였습니다.

마무리 짓고 와라.

알겠습니다.
아이젠하워는 미 국무부 극동차관보 월터 S. 로버트슨을 서울로 급파했습니다.
1953년 6월 25일, 서울에 도착한 로버트슨은 서울 어디에서든
휴전에 반대하는 문구와 구호를 볼 수 있었습니다.

"Don't sell Korea!"

"북진 통일! 휴전 반대!"

"Unification or Death!"
한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수천 명의 시위대가 도로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특파원들이 자리 잡은 구역 바깥에는 여학생 수백 명이 주저 앉은 채 울고 있었습니다.

12일 동안 이승만과 로버트슨은 작은 휴전회담이라 불린 회담을 했습니다.
이제 미국은 동맹인 한국과도 평화를 이뤄야 했습니다.
어린 여학생 수백 명이 울든 말든 미 육군의 지원 없이는 북진은 불가능했습니다.
도움 받을 곳이 없는 대한민국으로서는 고통이 얼마나 컸든 간에
전쟁으로 가장 큰 손해를 입는 것이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 대가로 대한민국은 미국의 비용으로 한국 육군의 사단을 20개로 늘리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계약금 2억 달러의 장기 경제 원조,
950만 달러어치의 식량 450만 톤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약속받았습니다.
38도 선 상의 평화를 조건으로 미국은 대한민국의 보호자,
그것도 사실상 영원한 보호자가 되는 데 동의했습니다.
대신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승만은 휴전 협정에 서명하지도 않고, 한국이 휴전 협정을 비준하지도 않겠지만
대한민국은 휴전을 지지할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대한민국은 휴전을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
전선이 불길에 뒤덮였지만 한국인들이 얼마나 죽든 상관없던
대다수 세계 사람들은 휴전의 향기가 황홀하게 다가왔습니다.
7월 19일, 유엔은 이미 합의가 이루어진 조건들을 대한민국이 뒤엎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공산 진영에게 엄숙히 보장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월요일, 유엔군사령부의 윌리엄 K. 해리슨 중장과 북한의 남일이 판문점에 들어왔습니다.
10시 1분, 해리슨 중장과 남일은 양측이 각각 준비한 18부의 정전협정문 중 첫째 협정문에 서명했습니다.
모든 문서에 서명하는 데는 12분이 걸렸습니다.
서명을 마친 두 사람은 일어나 아무 말도 없이 건물을 떠났습니다.
나중에 영어, 중국어, 한국어로 된 정전협정문에 클라크 대장과 펑더화이, 그리고 김일성이 서명했습니다.
클라크 대장은 파커 사(Parker company)가 이번 서명을 위해 특별히 그에게 보낸 금색 펜으로 서명하고
이를 치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기쁨을 느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정전 협정에서 희망을 얻는다면
끊임없이 경계하고 노력해야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인식으로
그 희망을 누그려뜨려야 한다."

"다 끝났다! 맘껏 쏴 버리자!"
이제 전선을 따라 배치된 부대에 지시가 떨어졌고
많은 병사들은 클라크 장군과 마찬가지로 터질 듯한 격정을 억제하면서
슬픔에 젖어 전선에 쌓아두었던 탄약을 쏴버렸습니다.
한국의 고지들이 화염과 폭음으로 흔들리는 것이 마지막이기를 모든 병사들이 희망했습니다.

판문점에서 정전협정문에 서명을 하고 12시간이 지나서 전선을 따라 자리한 고지들이 고요해졌습니다.
바다에서는 회색빛 찬 북한 바다에 나가 있던 배들이 뱃머리를 돌렸고
활주로에는 은빛 항공기들이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더 이상 전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평화도 없었습니다. 승리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정전(cease-fire)이라고 불렸습니다.
This Kind of War: The Classic Korean War History. T.R. Fehrenbach.
영상 출처
ps. 참고로 제목은 1958년 불가리아 전당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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