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루 만에 나라가 무너진 전투

1526년,
오스만 제국은 그야말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무라트 2세, 메흐메트 2세, 바예지드 2세, 셀림 1세로 이어진 명군들의 통치는 제국의 기반을 단단히 다져놓았고,
그 정점에는 '대제'라 불리는 쉴레이만 1세가 있었다.
이미 오스만 제국은 동방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상태였다.
1514년 찰디란 전투에서 사파비 왕조를 격파하며 아나톨리아의 패권을 확립했고,
완전한 굴복까지는 아니었지만 동방에서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를 효과적으로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1517년, 맘루크 술탄국을 정복해 이집트와 시리아를 장악하며
이슬람 세계의 종주권까지 손에 넣는다.
후방은 완전히 안정되었고,
이제 제국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서방, 즉 유럽으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헝가리 왕국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한때 헝가리는 강력한 군사력과 왕권을 바탕으로 중부 유럽의 강국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명군 마차시 1세가 있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이름을 떨친 명장 후녀디 야노시의 아들로,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군사적 기반과 명성을 바탕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마차시 1세는 '검은 군대'라 불리는 상비군을 창설하고,
귀족 세력을 억누르며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이 모든 기반은 빠르게 무너져 내린다.
왕권이 약화되자 귀족들은 권력을 놓고 끊임없이 다투었고,
국가 재정을 지탱하던 체계가 붕괴되면서 상비군 역시 해체되고 말았다.
그 결과 헝가리 왕국은 점차 군사력과 통제력을 상실하며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1521년,
오스만 제국은 본격적으로 헝가리 왕국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그 첫 목표는 다뉴브 방어선의 핵심 요충지, 베오그라드였다.
이 도시는 헝가리 왕국이 오랜 세월 동안 공들여 지켜온 남부 방어의 관문으로,
발칸에서 올라오는 오스만 군을 저지하는 최전선이었다.
헝가리 국왕 러요시 2세는 이를 구원하기 위해 병력 소집을 명령했지만,
귀족들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았다.
결국 군대는 제때 집결하지 못했고,
고립된 베오그라드는 오스만 군의 공세를 홀로 감당해야 했다.
50여 년 동안 굳건히 버텨온 이 요새는
결국 쉴레이만 1세의 대군 앞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다.
이 함락으로 헝가리 남부 방어선은 사실상 붕괴되었고,
오스만 제국은 다뉴브 강을 따라 북진할 발판을 확보하게 된다.
이제 그들의 다음 목표는, 왕국의 심장부인 부다였다.
1526년 4월 16일,
마침내 쉴레이만 1세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수만 명에 달하는 오스만 대군은 콘스탄티니예를 출발해, 다뉴브를 향해 서서히 진군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목표는 헝가리 왕국의 굴복이었다.
오스만 황제가 친정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음에도,
귀족들은 위기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이번에도 각자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움직이지 않았다.

국왕 러요시 2세는 뒤늦게 왕명을 내려
7월 2일까지 병력을 집결지로 모을 것을 명령했지만,
정작 기한이 되어도 주요 귀족들은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군대는 모이지 않았고, 지휘 체계 역시 정비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결국 러요시 2세는 직접 나서 진영을 설치하며 모범을 보였고,
그제서야 귀족들이 하나둘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대응은 한발 늦어 있었고,
전쟁 준비는 끝까지 미흡한 상태로 남게 된다.
이렇게 어렵게 집결한 헝가리 왕국군은
약 2만 5천에서 3만 명 규모의 병력을 형성하게 된다.
명목상으로는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각지의 지원군은 끝내 제때 합류하지 못했다.
특히 트란실바니아의 유렵 귀족 서포여이 야노시의 병력과
크로아티아 방면의 지원군 역시 전장에 도착하지 못하면서
헝가리군은 결정적인 전력 공백을 안은 채 싸워야 했다.
북상하는 오스만 군을 저지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결전을 선택한다.
결국 양군은 헝가리 남부의 평야 지대인
모하치 평원에서 맞서게 된다.
약 6만에서 7만에 달하는 쉴레이만 1세의 대군에 맞서,
헝가리군은 3만 남짓한 병력으로 결전에 나서야 했다.
수적으로도, 준비 상태로도 열세였지만,
그들은 물러설 곳이 없었다.
1526년 8월 29일,
마침내 양측은 모하치 평원에서 마주하게 된다.
이 전장은 헝가리군이 선택한 곳이었다.
곳곳에 늪지대가 펼쳐져 있었지만, 그 사이로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었고
헝가리군은 이 지형을 이용해 자신들의 주력인 중기병으로 결전을 벌일 계획이었다.
강력한 돌격으로 단숨에 적의 전열을 붕괴시키는 것,
그것이 그들이 기대한 승리 방식이었다.
하지만 헝가리군은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군은 이미 동방에서 수많은 강적들과 싸우며
기병 중심의 전투에 익숙해진 군대였다는 점이다.
찰디란 전투와 맘루크 술탄국 정복을 거치며,
그들은 단순한 기병 돌격이 아닌
화포와 보병, 기병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전술을 완성한 상태였다.
즉, 헝가리군이 자신하던 '정면 돌격'은
이미 오스만군이 수없이 상대해본 방식이었고,
그에 대한 대응 또한 준비되어 있었다.
약 2만 5천에서 3만 명 규모의 헝가리 왕국군은
러요시 2세를 중심으로 전열을 갖추었다.
중앙에는 보병과 함께 약 50여 문의 화포가 배치되었고,
양익에는 헝가리군의 핵심 전력인 중기병대가 자리 잡았다.
헝가리군의 전략은 단순했다.
중앙이 버티는 동안,
양익의 중기병이 적의 전열을 향해 돌격해 단숨에 붕괴시키는 것
즉, 이 전투는 처음부터 기병 돌격 한 방에 모든것을 건 승부였다.
쉴레이만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은 약 6만에서 7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전열의 최전방에는 루멜리아 지역에서 동원된 비정규 병력과 경기병,
즉 '아킨지'로 대표되는 선봉대가 배치되었다.
이들은 정규군이라기보다는 적의 진형을 흔들고, 공격을 유도하는 역할을 맡은 병력이었다.
그 뒤에는 제국의 핵심 전력인 정규군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화약 병기로 무장한 예니체리 보병과 중장기병인 시파히 기병대가 중앙과 후방에 배치되어
결정적인 순간을 대비하고 있었다.
또한 전열 곳곳에는 약 150~160문에 달하는 화포가 배치되어,
적의 돌격을 분쇄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루멜리아에서 동원된 비정규 병력과 아킨지 기병들이 서서히 전진하자,
헝가리군은 이를 본격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곧이어 헝가리군의 포문이 불을 뿜었고,
양익에 배치된 중기병대가 일제히 돌격을 개시했다.
전신을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병들은 전장을 가르며 돌진했고,
선봉에 서 있던 오스만 비정규군은 이를 버텨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헝가리군의 공격은 초반부터 성과를 거두는 듯 보였다.
하지만 오스만군은 이미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고,
선봉대의 후퇴는 계획된 움직임에 가까웠다.
오스만 제국군의 선봉대는 버텨내지 못하고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전열은 흔들렸고, 일부는 붕괴되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이에 쉴레이만 1세는 후방에 대기키시고 있던 정규군을 전방으로 투입한다.
예니체리 보병과 시파히 기병대가 전투에 가세하면서
무너질 것 같던 오스만 군의 전열은 다시 정비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흩어진 적을 몰아붙이며 계속해서 전진했고,
점점 오스만 군의 중심부를 향해 파고들었다.
일부 기병은 지휘부에 가까운 지점까지 도달했으며,
당시의 기록에는 헝가리 기사가 쏜 화살이
쉴레이만 1세를 위협할 정도로 근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헝가리 왕국군은 분명 전투 초반,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전열을 정비한 예니체리가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수천 명의 예니체리가 쏘아 올린 화승총 사격이
돌격해오던 헝가리 기사들을 정면에서 덮쳤다.
이어 전열 곳곳에 배치된 150여 문의 화포가 불을 뿜으며 전장을 뒤흔들었다.
연속적으로 퍼부어지는 화력 속에서
전진하던 헝가리 기병대의 기세는 급격히 꺾이기 시작했다.
두터운 판금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었지만,
집중 포화 앞에서는 그 화력을 온전히 버텨낼 수 없었다.
헝가리 군이 당황한 순간, 쉴레이만 1세는 결정을 내린다.
후방에서 대기하던 시파히 기병대가 양익으로 전개되며
헝가리군의 측면을 향해 일제히 돌격했다.
정면에서는 무수한 총탄이 쏟아지고, 측면에서는 기병이 파고드는 상황
헝가리 왕국군은 순식간에 포위망 속에 갇히게 된다.
국왕 러요시 2세는 전장을 이탈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망치던 도중, 그는 강을 건너다 낙마하고 만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던 그는 끝내 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그렇게 헝가리의 국왕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다.
지휘관을 잃은 헝가리군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도망치지 못한 병력 다수는 전장에서 전서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헝가리 왕국은 약 2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잃었으며,
1,000명에 이르는 귀족과 지휘관들이 목숨을 잃었다.
반면 쉴레이만 1세의 오스만 제국군은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만을 입은 채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단 하루 만에 한 왕국의 운명을 결정지어 버렸다.
이 전투의 참패로 헝가리 왕국은 사실상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후계자 없이 국왕 러요시 2세가 전사하자,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격화되며 정치는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이 틈을 노린 주변 세력들은 헝가리 영토를 둘러싸고 개입하기 시작했고,
왕국의 처지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결국 1541년, 헝가리 왕국의 수도 부다가 쉴레이만 1세의 군대에 의해 함락되면서
헝가리 왕국의 운명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헝가리의 영토는
오스만 제국, 합스부르크 가문, 그리고 트란실바니아 공국에 의해 분할되었고,
중세 이래 이어져 오던 독립된 헝가리 왕국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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